SOUTH+
BRIDGE

설치 버튼이 사라진 자리

단톡방에 뜬 링크 하나로 옛 명작이 브라우저에서 깨어나고, 옆 탭에서는 친구가 맵만 떼어다 만든 변주가 돌아간다. 아직 오지 않은 저녁이지만, 엑스박스는 그 조각들이 이미 놓였다고 공개 메모에 적었다.

데니 김 데니 김 · · 9분 읽기
설치 버튼이 사라진 자리

어느 저녁 일곱 시. 서둘러 저녁을 밀어 넣고 방으로 들어간다. 단톡방에 링크 하나가 떠 있다. 누르자 로딩 막대도, 설치 안내도, 기기 사양 경고도 없이 2010년대의 명작이 브라우저 탭에서 그대로 깨어난다. 오프닝 음악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캐릭터가 움직인다.

옆 탭에는 같은 게임이 하나 더 열려 있다. 맵은 그대로인데 주인공이 친구가 만든 고양이로 바뀌어 있고, 적들은 수학 문제를 던진다. 그걸 만든 친구는 코드를 한 줄도 쓰지 않았다. 어제 저녁 한 시간 동안 원하는 규칙을 문장으로 적었을 뿐이다. 고양이로 바꿔 줘. 적이 공격할 때 구구단을 던지게 해 줘. 다 풀면 보스방 문이 열리게.

둘은 음성 채팅을 켜 둔 채 서로의 버전을 오간다. 한쪽이 웃고, 한쪽이 그 자리에서 규칙을 고친다. 고친 버전은 새 링크가 되어 다시 단톡방에 떨어진다. 저녁 아홉 시가 되기 전에 그 방에는 같은 게임의 변주가 여섯 개 쌓인다.

같은 시각, 원작을 만든 스튜디오의 대시보드에는 어제 하루 자기 게임에서 갈라져 나온 파생본 숫자가 찍힌다. 누군가는 그 목록을 보며 화를 내고, 누군가는 그중 가장 많이 돌아간 변주를 본편에 넣을지 회의를 잡는다. 거기에 수익이 붙는지는 그때의 계약서가 정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몇 년 뒤라고 못 박기도 어렵다. 메모가 근거로 든 일들은 먼 미래가 아니라 최근 몇 주 사이에 벌어졌고, 브라우저 지원률 같은 전제는 이미 채워져 있다. 남은 것은 도구와 권리를 누가 먼저 정리하느냐다.

메모가 공개됐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게임 부문에 실험실을 따로 냈다. 10월 14일 엑스박스를 이끄는 아샤 샤르마가 사내에 보낸 메모를 그대로 공개하면서다. 이름은 엑스박스 랩스, 주소는 labs.xbox.com이다. 게임 메이커와 엔지니어, 과학자를 묶은 소규모 조직이고 스콧이 맡는다.

720억
연간 엑스박스 플레이 시간
약 5배
전 세계 코딩 시간 대비
90%
WebGPU 브라우저 지원률
75년
비디오 게임의 역사
메모가 들고 나온 숫자

메모가 먼저 짚은 것은 자사 로드맵이 아니라 바깥에서 벌어진 일이다. 최근 몇 주 사이 게임이 빠르게 디컴파일되고 재빌드돼, 애초에 상정하지 않았던 하드웨어 위에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윈도우 PC 빌드가 애플 실리콘으로 번역되고, 웹어셈블리와 WebGPU를 거쳐 브라우저 안에서 실행된다. 샤르마는 WebGPU의 전 세계 브라우저 지원이 90%에 근접했다는 수치를 함께 적었다. 더 놀라운 쪽은 따로 있다고 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게임들이 다른 게임의 소스코드 안으로 리믹스되고 있다는 것이다.

흔들린 세 가지 가정

샤르마는 이 실험들이 업계가 오래 붙들어 온 전제를 흔든다고 정리했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묶여 있다는 전제, 만드는 쪽과 노는 쪽 사이에 선이 있다는 전제, 그리고 사람들이 게임을 발견하고 경험하는 방식이 정해져 있다는 전제다.

기존 사업 모델을 흔들 때조차, 아니 흔들기 때문에 플레이어에게는 좋은 결과다.

메모의 문장은 방어적이지 않았다. 게임에 닿기 쉬워지고, 오래된 게임이 다시 숨을 쉬고, 더 많은 플레이어가 창작자와 공동 창작자가 되는 것은 명백히 좋은 결과라고 썼다. 기존 사업 모델과 부딪히더라도 그렇다는 말을 덧붙였다.

왜 게임이 다음 차례인가

랩스를 세운 근거로 샤르마가 든 것은 에이전트 이야기다. 코딩이 에이전트의 첫 주요 작업이 된 이유는 분명하다. 쓰고, 실행하고, 테스트할 수 있어서다. 게임도 같은 성질을 공유한다는 것이 메모의 주장이다. 여기에 규모를 붙였다. 사람들이 엑스박스 게임에 쓰는 시간이 연 720억 시간이고, 이는 전 세계에서 코드를 쓰는 데 들어가는 시간 추정치의 약 다섯 배다. 랩스는 공개적으로 만들고, 더 많은 사람이 플레이하고 창작하는지로 성공을 재겠다고 했다.

제작자가 읽는 법: 빌드 타깃이라는 말이 사라진다면

지금 소규모 팀의 일정표에서 가장 두꺼운 칸은 포팅이다. PC로 내고, 콘솔 인증을 받고, 모바일로 다시 짜는 일에 몇 달이 들어간다. 메모가 가리키는 방향에서는 그 칸이 얇아진다. 엔진이 뱉은 빌드를 웹어셈블리로 한 번 통과시키면 브라우저가 곧 플랫폼이 된다.

투자 미팅을 상상해 보면 차이가 선명하다. 지금은 노트북을 돌려 영상을 틀고, 상대는 팔짱을 낀 채 본다. 바뀐 세계에서는 링크를 보낸다. 상대가 자기 폰으로 삼십 초를 직접 해 보고 고개를 든다. 재미없으면 그 자리에서 끝나고, 재미있으면 그 자리에서 다음 질문이 나온다. 데모가 서류에서 경험으로 옮겨 간다.

반대로 무거워지는 칸도 있다. 어디서든 돌아간다는 말은 어디서든 뜯긴다는 말과 붙어 있다. 코드를 숨겨 지키던 관행은 힘을 잃고, 남는 방어선은 서버에 있는 로직과 계속 갱신되는 콘텐츠, 그리고 커뮤니티다. 혼자 만든 게임이 하루 만에 열 갈래로 갈라질 때 그것을 침해로 볼지 유통으로 볼지는, 만든 사람이 미리 정해 두어야 할 문제가 된다.

퍼블리셔가 읽는 법: 유통이 아니라 발견을 판다

설치와 스토어 심사가 얇아지면 퍼블리셔가 쥐고 있던 지렛대 하나가 줄어든다. 플랫폼에 올려 주는 능력 자체의 값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수천 개 중에서 이것을 골라냈다는 판단, 첫 주에 사람을 모아 주는 힘, 현지화와 운영처럼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계약서 문구도 달라질 법하다. 플랫폼별 독점이라는 조항은 어디서든 실행되는 빌드 앞에서 의미가 옅어진다. 대신 이런 줄이 늘어난다. 리믹스는 비상업 목적에 한해 허용한다. 파생본이 월 10만 회를 넘기면 원작자와 수익을 나눈다. 원작 캐릭터를 쓰는 변주는 승인 목록에 등록한다. 지금은 아무도 표준을 갖고 있지 않고, 랩스도 내놓지 않았다.

업계가 읽는 법: 회색지대를 누가 먼저 선으로 긋나

메모에서 가장 조심스러운 문장은 IP 대목이다. 책임 있는 관리자로 남겠다는 말을 굳이 붙인 이유가 있다. 게임을 뜯어 다른 게임 안에 넣는 일은 지금 법으로 깨끗하게 갈리지 않는다. 팬 포팅과 에뮬레이션이 수십 년 걸어온 길 위에, 이제 에이전트가 하룻밤에 해내는 속도가 얹혔다.

언젠가 열릴 회의실 풍경도 그려 볼 수 있다. 한쪽에는 파생본 백만 개가 오히려 원작 매출을 끌어올렸다는 데이터가 놓이고, 다른 쪽에는 자기 세계관이 조롱거리로 변주된 스튜디오의 항의서가 놓인다. 플랫폼 보유자가 공개 실험실을 세워 그 과정을 들여다보겠다고 한 것은, 선을 밖에서 그어지기 전에 안에서 그어 보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엔진 회사들도 같은 질문을 받는다. 텍스트 기반 씬 포맷 덕분에 모델이 씬을 잘 쓴다는 샤르마의 설명은, 포맷을 열어 둔 엔진일수록 에이전트 시대에 유리하다는 말과 같다. 닫아 두면 안전하지만 학습 데이터에서 빠지고, 열어 두면 빨리 퍼지지만 통제를 잃는다.

유저가 읽는 법: 소유라는 감각이 흔들린다

가장 먼저 체감될 변화는 단순하다. 친구가 보낸 링크를 누르면 게임이 그냥 시작된다. 다운로드 용량도, 기기 사양 확인도 없다. 서랍 속에서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옛 콘솔에서만 돌던 게임이 낡은 노트북 브라우저에서 깨어나는 장면도 같은 흐름에 있다. 메모가 오래된 게임에 새 숨을 불어넣는다고 말한 것이 이 뜻이다.

대신 익숙한 감각 하나가 흔들린다. 소유다. 어느 날 접속하면 이런 문장이 떠 있을 수 있다. 이 타이틀의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 이상 실행할 수 없습니다. 내 기기에 파일이 있던 시절에는 적어도 먼지 쌓인 디스크를 꺼내 볼 수 있었다. 불러오는 세션이 되면 그 가능성마저 사라진다. 메모는 이 지점에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그 저녁

앞서 그린 저녁은 아직 오지 않았고, 그대로 올지도 알 수 없다. 랩스가 실제로 무엇을 내놓을지는 한 줄도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그 방에서 여섯 개의 변주가 만들어지는 동안, 누구도 설치 파일을 기다리지 않았고 누구도 스토어 심사를 통과하지 않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플랫폼을 쥔 쪽이 자기 사업 모델이 흔들릴 수 있다고 먼저 적어 내놓은 문서가 공개됐다는 사실이, 지금 이 업계가 서 있는 자리를 보여준다.

이 글이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글쓴이

데니 김

데니 김

SOUTH BRIDGE 발행인. 부산에서 AI와 산업의 구조 변화를 본다.

데니 김의 다른 글 보기 →

이 글이 유용했다면 공유해 주세요

데니 김 칼럼 더 보기 →

데니 김의 다른 글

전체 보기 →

관련 뉴스

Games 전체 →